남해의 모산 망운산
2006년3월26일 일요일
언제라도 갈수있는 지척에있는 섬 남해, 아름다운 현수교 남해대교와 삼천포서 창선으로 이어지는 창선.삼천포 연육교
가 섬을 이어주고 있고 다도해의 아름다운 작은 섬들이 점점히 떠 있고 또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노량해전
과 이순신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섬. 서쪽 광양만으로는 광양제철과 여수만 오동도도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총동창회
산행을 망운산으로 가기로 했다. 몇번이나 갔으면서도 싫증이 나지않는 산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망운산은 남해읍
을 감싸안듯 북쪽에 위치해 포근히 읍을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금산만을 찾아 헤멜때도 알려지기를
꺼려 한다고 하지만 남해의 모산임에는 틀림없다. 산의 아기자기한 맛과 아름다움을 얘기하라면 단연 설흘산과 금산을
들먹거리겠지만 남해는 망운산을 비롯하여 금산,호구산, 설흘산등 아름다운 산들이 많아 당일코스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등산코스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남해읍에서 공설운동장을 지나 남산서 오르는 산길이 가장 무난한 코스며
약3시간여의 산행을 즐길수 있어 많이 애용하고 있다. 산길은 원점회귀코스나 정상을 올랐다가 망운암을 거쳐
화방사로 내려오는 코스가 가장 좋다. 오늘은 남산서 시작 화방사로 내려오는 코스로 정했다고 한다.
![P3260394[2].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97/28597/3/P3260394%5B2%5D.jpg)
입구에 서있는 등산 안내도

총동창회 산행이라고는 하지만 산을 잘 다니지 않는 동문들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많이 소요가 될것같다.11시출발
점심은 정상에 올라 좌측으로 있는 송신안테나 탑에서 먹기로 하고 후배님들이 차를 이용 먼저 도착해 있기로 했다.
모두들 간편한 차림에 물병하나씩만 들고 산행을 시작한다. 총동회장을 맡고 있는 황창연친구가 선두로 오르고
박일배 산행대장과 내가 후미를 맡아 오르기로 하고 총인원 약80여명 후미를 맡다 보니 바쁠것도 없고 해서
늦이막이 출발을 한다. 아니나 조금 오르니 벌써 부터 쳐지기 시작하는 동문들이 나오고 천천히 걸어도 어느새
선두와 같이 가게 된다. 다시 한번 정렬을 하고 후미로 다시 올라간다. 이곳으로 오르는 길은 남해군민들의 아침
산책로 길이기도 하다.

잘 정비되어 있는 통나무 오름길

10분만 오르면 약수터가 나오고 바로 위에는 산림욕장과 지압보도등 각종 운동로와 쉴수있는 벤치 정자등이
비치되어있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이용가능하도록 잘 정비되어 있다.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

심신 단련장이다. 우측으로는 지압로와 운동을 할수있는 산림욕장이다.

잠시 쉴수있는 통나무 벤치

가족단위로 산책겸 가벼운 등산을하고 머물수있는 정자

사방이 훤히 뚫려있는 곳에 전망대가 있다.

관대봉과 그 뒤편으로 망운산 정상이 보인다.

관대봉 아래서 바라본 남해읍전경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창선섬

관대봉
![P3260413[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97/28597/3/P3260413%5B1%5D.jpg)
송신안테나를 배경으로 한컷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다. 부산서 온 긴차를 모는 ktx기관사 친구도
모처럼의 산행이 재미있다고 열심히 오른다. 우리기수 회장님은 뒤로 쳐져 사진을 못찍어 아쉽다.

사천있는 제경모친구가 동굴을 들여다 보고 수정굴이라고 이름지었다. 앞번에 갔던 천반산 할미굴보다 크다고 하면서.

관대봉으로 돌아 오르는 바위밑 수정굴앞에 크고작은 소망탑

왼쪽송신탑이 지도상의 정상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오른쪽봉우리가 망운산 정상석이 서있다.

관대봉 정상

광양만이 시야를 밝히고

송신탑을 가는길은 부드럽게 열려있고 우측밑으로는 철쭉이 군락지다. 5월이면 만개하며 피를 뿌린듯한 붉은 색이
능선을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

단석바위인가?

여기저기 칼로 밴듯한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고인돌처럼 박혀 있고.

저멀리 뾰족하게 솟아있는 산이 호구산이다.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은 남해금산

용두봉으로 가는길에 팻말 헬기장이 바로 옆에 있으며 송신탑이 있다.

점심식사후 기수별로 한컷트씩 하고 우리 2회 기수들 총동회장과 산행대장이 우리기수다.왼쪽첫번째 산행대장,
세번째가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황창연 친구,맨오른쪽이 우리기수 회장이다. 나는 오른쪽서 세번째.별볼일 없는사람.

3기동문들

총동문기수들

5회기수들

올주관기를 책임질 7회 기수들

1회기수들

오를때는 점점히 떠있던 섬들이 물이 빠지자 육지와 연결되어있다. 건너편은 광양제철소.

정상가는길

송신탑을 보고. 임도가 방화선처럼 꾸불꾸불 하다.

정상이 지척인데 모두들 안간다고 하네.거참 산에 왔으면 정상은 오르는게 상식아닌감.

정상은 오르지도 않고 전부 우측으로 망운암을 향해 내려가고 혼자 만이 정상을 다녀오고...


망운산 정상 표지석과 돌탑

근심을 푸는곳 망운암 해우소

아기자기한 망운암

멀리 호구산이 다가선다.

내려오는 길에서 잠시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화방사 채진루
채진루는 대웅전 앞마당으로 출입토록 대웅전과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마당에서 출입이
쉽도록 누각바닥이 마당과 같은 높이로 만든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오량(五樑)
구조로된 2층 맞배지붕집이다. 세부장식이 조선말기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채진루에는
화방사 효천 주지스님이 1997년 해를 꼬박 넘기는 원력불사로 복원한 "이 충무공 충렬묘비
"목판비문이 서 있다. 이 목판비는 높이 3m, 폭1.6m로 나무판 앞 뒤에 충무공의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1300여자가 새겨져있고 남해 충렬사에 입석되어 있는 비와 똑같은 크기와
내용이다. 당시에 탁본해 두었던 것을 새로 복원하였다

화방사 절 입구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보광산(금산)에 보광사를 세우고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건립한
것이 화방사 역사의 시작이다. 고려시대인 1200년대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이
연죽사를 현 위치의 서남쪽 400m에 옮기고 영장사(靈藏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이렇다. 진각국사는 멀리 신령스러운 기운이 바다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떼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산을 바라보니 호산(湖山)의 좋은 형상인 망운산이 나타났다.
그는 말했다."영구(靈區)가 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냐"그 뒤 절 이름을 영장이라 하고 승도를
거처하도록 했다. 영장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는 데 인조 15년(1637),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戒元)과 영철(靈哲) 두 선사가 지금 위치에 이건 중수(移建重修)하고 '연화형국'의
뜻을 취해 화방사라고 했다. 화방사 역시 103년이 지난 1740년에 화재를 입었다. 사방이 일시에
재가 되고 승도들이 흩어졌으나 다음해인 영조17년(1741)에 석순, 충찰, 충념 등이 동지들을
모아 재건했다.

화방사 대웅전
본래명칭은 보광전이었으나 보광전이1981년10월1일에 화재로 소실되자1984년12월29일에 신축
복원하고 대웅전이라고 하였다.

조용한 법당

범종각

연등은 나무에서 열리고 석가는 보리수아래서 깨우치고...

앞마당에 서있는구층석탑 월정사 석탑을 본떠 똑같이 만들었다고한다.

이락사입구
임진왜란 때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곳이다. 1598 11월19일 이른 아침 충무공은
도망치는 왜적을 무찌르다 적이 쏜 유탄에 맞았으나 “나의 죽음을 알리지마라” 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때 조선수군은 왜선200여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세웠다. 현재의 유허지는 충무공의 유해가
뭍에 올려졌던 곳으로 관음포가 보이는 곳에 충무공의 순국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1832년에
충무공유허비와 이락사가 세워졌고 1950년 남해군민의 헌금으로 정원과 참배로가 만들어졌다.
1965년에 고 박정희대통령은 이락사에 대성운해 (큰별이 떨어졌다)라는 액자를 내렸고 1973년4월에
사적 으로 지정되었다.

이락사
이락사의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거치른 물결을 건너 충렬사에 이르니 고결한 충혼이 머무는 곳 바다는 깊구나. 나라를 위해 대의에 죽었으니
어찌 한이 남으리오. 타고났던 천성인 것을 공께서 가신 뒤 아직도 바다 속 어룡들은 노기에 차 있고, 산야의
온갖 금수들은 슬픔 못잊어 울고 있도다.'
공이 순국한지 234년 뒤, 8대손 이항권이 통제사로 있을 때인 1832년 충무공 전몰지인 관음포를 찾아 충무공의
유허비와 비각을 세워 유서 깊은 순국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73년 6월 사적 제232호로 지정되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라고 부르게 되었다. 약 800m 길이의 반도형 야산의 남방을 관음포라 하는데, 이순신
장군께서 적의 유탄에 맞아 돌아가신 이후로 이 곳을 이락포라 불러왔으며 이 곳 비각을 이락사라 이름하였
다고 전해진다. 관음포만 일대는 우리 나라 최고의 호국성지이다. 그곳은 몽고의 침략을 불력으로 물리치기
위한 고려대장경의 목재를 들여왔던 곳이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관음포대첩과 노량해전이라는 두 번의
해전이 치뤄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1991년에 첨망대 누각을 세웠으며, 1998년 12월 16일에 이충무공께서
유언한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내용의 한문 유언비를 이락사 앞뜰에 세웠다.

이충무공 유언비
아름다운 산행을 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은 이름같이 맑고 고운 수정총동회장님과 주관기 제7기
후배님들의 배려로 무사히 산행을 다녀 왔으며 아름다운 산을 정한 산행대장님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올 총동체육대회도 더욱 알찬 결실을 맺기를 바라면서 산행기를 마칩니다.수정 총동화이팅.